
1980년대 홍콩의 하늘을 가린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 14층 높이의 건물들이 미로처럼 얽히고, 좁은 골목에선 물 떨어지는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끊이지 않았어요.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이곳에서 5만 명이 숨 쉬며 살아갔죠. 바로 '구룡채성'이라 불린 전설의 무법지대예요. 지금은 아름다운 공원으로 탈바꿈했지만, 그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홍콩 현대사의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져요.
청나라 요새에서 무법지대로
구룡채성의 시작은 18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원래 이곳은 청나라가 홍콩 일대를 감시하기 위해 세운 군사 요새였어요. 아편전쟁 이후 홍콩이 영국에 넘어갔지만, 구룡채성만큼은 청나라 영토로 남았죠. 그런데 1898년 신계 조약으로 상황이 복잡해졌어요. 영국은 구룡반도 전체를 99년간 조차했지만, 청나라는 구룡채성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어요.
1899년 영국군이 청나라 관리들을 강제로 내쫓으면서 이곳은 법적 공백 상태에 놓였어요. 영국도, 중국도 명확한 관할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회색지대가 된 거죠. 이후 구룡채성은 홍콩에서 가장 독특한 공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했어요. 세금도 없고, 법의 통제도 받지 않는 이곳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어요.

무법의 도시, 5만 명의 삶
제2차 세계대전 후 구룡채성은 급격히 성장했어요. 중국 본토에서 피난 온 난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죠.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 되었어요. 0.026 제곱킬로미터에 5만 명이 살았으니, 평방킬로미터당 거의 190만 명이 거주한 셈이에요.
건물들은 무계획적으로 쌓여 올라갔어요. 한 건물이 옆 건물에 기대고, 그 위에 또 다른 층이 덧붙여지면서 거대한 미로가 완성됐죠. 햇빛이 들지 않는 골목, 전선이 거미줄처럼 얽힌 복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계단이 일상이었어요. 정부의 감시가 없다 보니 무허가 치과, 약국, 공장들이 성업했고, 마약 거래와 조직 폭력배의 활동도 활발했어요.
하지만 구룡채성은 단순한 범죄의 온상만은 아니었어요. 가난한 이들에게는 저렴한 주거지였고, 규제를 피하려는 소상공인들에게는 기회의 땅이었죠. 어떤 이들은 이곳에서 가족을 이루고, 아이를 키우며, 평범한 삶을 살아갔어요. 구룡채성은 혼돈과 질서, 범죄와 일상이 공존하는 독특한 공동체였어요.

철거와 재탄생
1980년대 후반, 홍콩과 중국 정부는 구룡채성 철거에 합의했어요. 1987년 공식 철거 계획이 발표되고, 1993년부터 본격적인 철거가 시작됐죠. 5만 명의 주민들은 보상금을 받고 떠났고, 1994년 4월 마지막 건물이 무너졌어요. 100년 넘게 존재했던 무법지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어요.
철거 후 홍콩 정부는 이곳을 공원으로 조성했어요. 1995년 개장한 '구룡채성공원'은 청나라 시대 정원 양식을 본떠 만들어졌어요. 연못과 정자, 바위 정원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공간이 탄생했죠. 공원 한편에는 구룡채성의 역사를 기억하는 전시관도 마련됐어요. 옛 성벽의 일부와 두 개의 대포가 보존되어 과거를 증언하고 있어요.
구룡채성 공원 방문 가이드
지금 구룡채성공원을 방문하면 평화로운 녹지 공간을 만날 수 있어요. 공원 내 전시관에서는 구룡채성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과 모형을 볼 수 있어요. 특히 1:500 스케일의 정밀 모형은 당시의 복잡한 구조를 생생하게 보여줘요.
공원 관람은 1시간 정도면 충분해요. 오전 일찍 방문하면 태극권을 하는 현지인들과 조용한 정원을 함께 즐길 수 있어요. 근처에는 홍콩의 전통 시장인 Lok Fu Plaza도 있어서, 공원 관람 후 현지 먹거리를 맛보기에 좋아요.

대중문화 속 구룡채성
구룡채성은 철거된 후에도 수많은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에 영감을 주었어요. 1993년 성룡 주연의 영화 '중안조'에서는 구룡채성의 복잡한 골목을 배경으로 한 추격 장면이 등장했죠.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게임 '샤무 2'와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등도 구룡채성을 모티브로 삼았어요.
건축가와 도시학자들에게 구룡채성은 연구 대상이에요. 정부의 개입 없이 주민들 스스로 만들어낸 '유기적 건축'의 극단적 사례로 평가받죠. 좁은 공간에서 최대한의 생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주민들의 창의성은 놀라울 정도였어요. 일부 건축학자들은 구룡채성을 '자생적 도시 계획'의 실험장으로 보기도 해요.
역사의 교훈
구룡채성은 단순한 무법지대가 아니라 복잡한 역사와 인간 드라마가 얽힌 공간이었어요. 제국주의 시대의 법적 공백이 만들어낸 독특한 공동체였고, 가난과 기회, 범죄와 생존이 공존한 곳이었죠. 이곳에서 살았던 5만 명의 이야기는 홍콩 현대사의 한 단면을 보여줘요.
지금 구룡채성공원을 거닐며 평화로운 연못과 정자를 바라보면, 불과 30년 전 이곳에 존재했던 거대한 콘크리트 미로가 믿기지 않아요. 하지만 보존된 성벽과 대포, 전시관의 사진들은 그 시간이 실재했음을 증명하죠. 역사는 사라지지만, 기억은 남아 다음 세대에 전해져요.
홍콩을 방문한다면 구룡채성공원을 꼭 들러보세요. 화려한 관광지는 아니지만, 홍콩의 진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곳이에요. 구룡채성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고 있어요. 법과 질서가 없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일까요? 혼돈 속에서도 사람들은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갈까요?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는 누구를 위한 공간일까요?
구룡채성은 사라졌지만, 그 질문들은 여전히 유효해요. 홍콩의 작은 공원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우리 시대 도시와 공동체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어지기를 바라요.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